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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로·버스로

기차타고 버스타고_홍성 홍주성

by 느린바퀴 2008. 1. 6.

홍성역에서 내려서 먼저 홍주성과 홍주의사총을 볼까도 했지만 원래 목적지인 해미읍성을 먼저 보고 다시 홍성으로 와서 홍주성으로 향했다. 만해 한용선 선생, 김좌진 장군의 생가도 홍성에 있단다. 

 

홍주성 가는 길에 만난 김좌진 장군의 동상. 해가 저물어서 컴컴...

 

홍주성의 일부였던 조양문. 예전의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차가 다니는 도로와 맞닿아 있다. -,.-

 

조금 옆에서 다시 조양문

 

홍주성벽 앞의 홍주성 안내판

 

홍주성벽...

 

극히 일부만 남은 듯하다. 대부분은 일제가 파괴했다고...역시 씁쓸한 기분

 

홍성군청 앞의 커다란 나무.

 

홍성군청 내부에 남아있는 홍주성 흔적...안희당. 홍주목사가 거처한 동헌

 

다른 각도에서 다시

 

홍주아문

 

역시 홍성군청 내에 남이 있는 여하정.

 

조명받는 홍주아문 뒤에서. 

 

조명받는 홍주아문 앞에서

 

다시 홍성역으로 가는 중에 조명받는 김좌진 장군 동상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파하는 시기. 일제말부터 한국전쟁 사이의 기간.

좌우로 나뉘어 갈등하며 죽어간 그때의 지식인들이 가장 슬프고 고통스럽다. 지금의 나완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도 말이다. 윽~ 태백산맥 마지막권을 마저 읽어야 하는데...쩝!

 

어둠이 내려앉은 홍성역

 

가장 인상적이고 기분좋았던 것. "맞이방" 우리말 좋잖아!!!

 

[사적 제231호. 1972년 지정. 면적 3,537 m2.

최초 축성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했던 행풍현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면 규묘는 1,300척의 토성으로 400개의 성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홍성읍성의 둘레가 533보() 2척()이며, 성 안에 샘이 하나인데, 사철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조선 초기 지방행정구획을 개편하면서 각 관읍의 읍성을 새로 쌓게 되자, 이 성도 1451년(문종 1)에 새롭게 수축하여 성 둘레 4,856척 ·높이 11척 ·여장()높이 2척, 적대() 24대 가운데 6대만 쌓고, 문() 4개 중 하나는 옹성()이 없으며, 여장 608, 성안에 우물 2, 작은 개울 하나가 있다. 1870년(고종 7) 홍주목사 한웅필이 연봉금 3천냥과 원납금, 지세과금으로 석성을 개축하여 1,830척에 560척을 중보하여 석축하면서 650개의 첩과 130개의 치, 2개의 곡성(曲城), 4곳의 우물과 연못을 신설한 다음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동편 수문을 거쳐 남문천과 금마천으로 흐르게 하고 동서북에 문을 세우고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紅霓門)으로 하였다.
같은 해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文額)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 하였다.

또한 이 성은 1906년 을사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여 민종식() 이세영() 등이 일으킨 의병부대가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퇴시킨 사적지로도 유명하다.  그 후 홍성지방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훼철하고 성곽 곳곳을 철거하면서 동문마저 훼철하려던 것을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되었다.
홍주성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810m만 현존하며 성내에는 관아 건물이 35동에 이르렀으나 조양문, 홍주아문, 안희당(동헌), 여하정만이 남아 있다.
1978년 10월 7일 강도 5도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주변 가옥 64동 철거와 토지를 매입하여 주변정비 및 성곽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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