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브라질 월드컵 8강전이 시작되는 날. 지구 반대편에서 경기가 열리니 오밤중에 경기를 한다. 두 경기를 다 보면 밤을 꼴닥 새워야 하므로 한 경기만 본다. 독일 대 프랑스전. 결과는 독일의 승리. 4회연속 4강 진출이라니~ 대단한 독일축구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거지만 아무리 봐도 뢰브 감독은 스포츠인이기보다는 예술가 같은 이미지다. :0) 여튼...아쉽지만 한 경기만 보고 마곡사 행을 위해 새벽에서야 잠을 청한다.
수면부족은 사람을 멍~하게 한다. 9시대 전철을 타고 배방역으로 가서 출발하려 했는데 어영부영하다가 간발의 차로10시대 전철도 놓치고...배방역에 도착하니 12시 30분경. 뭐 대략 왕복 68km를 예상하니 시간은 충분하다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페달질을 시작한다. 어제는 참으로 화창하고 맑은 하늘이었는데 아쉽게도 하늘이 너무나도 뿌옇다. 그래도 군데군데 가로수가 만들어주는 그늘이 있어 달리긴 좋다. 잠시 멈추고 몰 한 모금 마시는데 등산복 차림의 두 사람이 다가와 길을 묻는다. 등산을 마치고 하산했는데 차를 주차한 곳을 찾지 못하는 것 같다. 두어 번 지나간 경험과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지도검색의 결과를 토대로 설명해준다. ㅎㅎ 주차장까지 걸어가기는 좀 먼거리이고 좀더 가다가 택시를 타겠단다. 잘가시라 하고 다시 출발한다. 수철리 오르막이 끝나고 이젠 내리막. 최고속도 58km/h가 나왔다. 아...이 길을 오후에 오르막으로 올라야 한다는거지...느린 오르막질 속도 때문에 잠시 갈등이 인다. 마곡사까지는 큰 오르막이 네 번이라는데...왕복하면 여덟 번. 과연 해지기 전에 돌아오는게 가능한가. 인적이 드문 한적한 지방도로를 어둑할 때 혼자 달리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거 같다. 출발이 늦은 탓이다. 일단 곡두터널까지 가서 시간을 보고 결정하기로 하고 페달질을 계속 한다. 오르막질 속도를 높이기 위한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는 순간이다.
도로가 참 이쁘다. 다니다 보면 소박하지만 참 이쁜 길이 많다. 마주오는 차의 차창 밖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운 손 하나가 나온다. 뭐여? 나? 지나쳐 간다. 이번엔 뒤에서 오던 차가 앞으로 가면서 창문 밖으로 큼지막한 팔 하나가 나와서 계속 손을 흔든다. 잠시 보다가 나도 한 손을 들어 살짝 흔든다. 팔이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간다. 둘 다 격려의 행동이니 감사요~!
곡두터널에 이르기 위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아마도 경사도7%였던가. 큰 오르막도 아닌데 속도가 안난다. 음~그래 마음 편하게 그냥 광덕사로 가자. 마곡사는 다음에 일찍 출발해서 느긋하게 가지 뭐. 유턴을 한다. 이게 홀로잔차의 장점이 아니겠는가(동시에 단점이기도). 느리적거리는 게으름쟁이의 핑게일지라도. ㅎㅎ 뭐..구석구석 전국일주가 목표라 어디든 언젠가는 다 가볼거니까 이 번이면 어떻고 다음 번이면 어떠랴~.
광덕사 일주문 뒤에 있는 수령이 약 520년이나 된다는 보호수 느티나무. 대단하다.
수령이 약 400살 정도라는 광덕사 호두나무. 전설에 의하면 약 700년 전인 고려 출렬왕 16년(1290) 9월에 영밀공 유청신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도나무의 어린 나무와 열매를 가져와 어린 나무는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유청신 선생의 고향집 뜰 앞에 심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의 나무가 그 때 심은 것인지의 정확한 근거자료는 찾지 못하고 있단다. 이곳 마을에서는 이것이 우리나라에 호도가 전래된 시초가 되었다 하여 이곳을 호도나무 시배지(처음 심은 곳)라 부르고 있다고.
등산로로 연견될 곳.. 올라가보고 싶지만...낯선 곳이고 되돌아가야 하니까...:P
광덕사에서 산으로 1km정도 올라가면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 중 한 명으로 불린 운초 김부용의 묘가 있대서 올라가는데 키 큰 풀이 많다. 그냥 되돌아 내려온다. 쩝~ 역시 돌아갈 길이 부담이라는...사람이 없는 낯선 산이 살짝 무섭기도 하고...
광덕사 대웅전이 있는 풍경
'그대 발길 돌리는 곳.'흔히 "출입금지' 또는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표현하는데 굉장히 시적이고 감성적인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o)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3층석탑. 와~ 그럼 거의 천년이 넘었다는거?!
내려오다 보니 연꽃이 있다. 아직 활짝 피진 않았지만 허접사진 한 장 찍고 길가에서 자두를 파는 할머니에게서 자두를 조금 산다. 자두를 좋아하시는 엄니를 위햐여...배낭의 용량 때문에 많이 살 수는 없다. 얼려온 물병이 어느 정도 비었기에 배낭의 무게 변화는 거의 없다. ㅎㅎ
좀 이른 시간이지만 이제 다시 돌아간다. 길이 좋다. 나오다가 지역분에게 광덕사로 들어가 않고 계속 가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물으니 계속 달리면 유구와 공주로 가는 옛길이고 구불구불 돌아간단다. 오호~ 조만간 이길을 달려봐야겠다.
전에 충북 영동군에 갔을 때 호도나무가 가로수 인 것을 봤는데 여기도 가로수가 호도나무이다. 설마 이 가로수들에 열린 호도도 추수해서 먹는건 아니겠지???! 오가는 차가 내뿜은 배기가스를 고스란히 호흡한 거잖어...설마...
다시 수철저수지를 지난다. 맹씨행단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전에 다녀온 곳이지만 간만에 다시 들러보기로 한다. 맹사성고택 앞에 있는 수령이 약 320년이라는 회화나무.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었다던 서산 해미읍성의 회화나무가 떠오른다...
맹사성고택에 있는 누렁이. 예전에 있던, 초월한 듯 오가는 사람을 무심히 바라보던 검둥이는 보이지 않는다. 헌데 이 녀석은 무척이나 겁쟁이인 것 같다. 인기척이 나니까 재빨리 제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등치도 큰 녀석이. 맹씨행단을 보러오는 사람이 꾸준하게 있는 것 같던데 저리 겁이 많으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다. 꼼짝않고 집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내가 대문을 나서니까 그때서야 다시 밖으로 나온다. '누렁아, 겁이 나도 밖으로 나와서 부딪쳐봐. 방문객들을 반기며 꼬리쳐주면 그들도 널 이뻐해줄거야.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뭐? 너나 잘하라구?!...그, 그래...풉~! 혹시 대문 앞에 있는 자신의 큰 등치를 사람들이 무서워할까봐 안심하라고 피해주는건가? 어쩌면 그럴지도...ㅎㅎ 전에 진안 모래재를 넘으러 갔을 때 어느 주유소 앞에서 본 강아지가 생각난다. 꼬리치며 뱅글뱅글 돌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나중에 막 달려오는 걸 갈 길도 멀고 큰 등치가 살짝 겁이나서 '오지마' 했더니 서운한 듯 멈추던 녀석. 오지말라고 한 말이 어찌나 미안하던지...나중에 다시 지나면 소시지 하나 준비해 가서 줘야지 했었는데 다시 볼 수 있으려나...
맹씨행단의 은행나무. 수령이 600년이 넘었단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약하고 유한한 존재가 아닌가. 오늘 만난 나무들의 수명만을 생각해 본다 해도 말이다. 그런 유한한 존재가 제멋대로 자연을 마구 파헤지고 훼손하며 주인노릇을 하다니...쩝~!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蓉]
김부용은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여류 시인 중 한 명으로 불린다. 생존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며 대략 1800년 초에 태어나서 1850년대 이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해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김부용은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고 한다.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게 된 김부용은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김부용은 12세에 기적에 오른 기녀였지만 16세에 성천 군민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한시(漢詩) 350여 수를 남겼다. 22세 때에 김부용은 평양 감사와 호조 판서를 지낸 77세의 연천 김이양(金履陽)[1761~1852]의 소실이 되었고 15년간 성천과 한양에서 각기 살았다고 한다. 시문집으로는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와 『오강루 문집(五江樓文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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