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광해군묘
가끔은 만일 정조가 영조만큼 장수했었더라면, 소현세자가 그리 죽지 않고 왕이 되었더라면, 광해군이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장기집권했더라면...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다른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뭔가 많이 아깝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5년 단임제나 4년 중임제를 생각할 때 광해군의 경우 재위기간 15년이면 그리 짧은 기간도 아니니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 해도 아쉬워 할 필요가 없는건가??! 흠...모두 다 뭐 별로 의미 없는 생각일게다. 굳이 시인의 표현을 빌지 않아도 크던 적던, 사적이던 공적이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호기심 혹은 아쉬움은 언제나 있는거니까. 어쩔 수 없이...늘...
여든 날씨도 그런 대로 좋은 것 같고 해서 나양주시에 있는 광해군묘를 찾아가 보기로 한다.
출발-양재천-한강-왕숙천-광해군묘의 순으로 왕복하니 속도계에 찍힌 총거리는 120.3km
한강을 타고 달리다 보니 구리시엔 유채꽃이 만발이다. 잠시 멈춰 허접사진을 찍어본다.
왕숙천도 정비가 잘돼있다. 왕숙천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진첩읍 팔야리에서 팔일을 머물렀다 해서 이 앞하천을 왕숙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진천읍 팔야리란 지명 역시 이성계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환궁하는 과정에서 한양땅에 들어가기 전에 여덟 밤을 지낸 마을인데서 유래했단다. 지명의 유래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광해군묘 올라가는 길. 푸르름이 좋다.
처음 본 경사도 25%. 빡세긴 하지만 생각보단 심하지 않다.
헥헥거리며 올라 숨고르기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광해군묘는 개방돼 있지 않다. 안내판에 교육목적 이외엔 출입금지라고 돼 있어 혹시나 열고 들어갈 수 있나 살펴보니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다. 2022년까지는 비공개된단다.
열려 있다면 이길을 통해 닿을 수 있는데...
멀리서 뒷모습만 보는 것으로 만족. 광해군과 왕비 유씨의 묘가 나란히 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왕자도 왕비도 일찍 보낸 후 폐위된 왕으로서 홀로 남은 그 많은 세월을 어떤 마음으로 보냈을까. 요즘들어 재조명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좀더 머물고 싶었는데 어느덧 4시. 12시가 넘은 시간에 출발했으니...어둡기 전에 귀가하려면 서둘러 내려가야한다.
내려오는 길에 있는 멋진 소나무가 많은 사능 앞에 잠시 멈춘다. 밝은 미소와 함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내는 매표소 관계자들과 잠시 이야기도 나누고 지도도 얻고...영화 덕분인지 요즘은 광해군묘를 찾는 이들이 좀 늘었단다.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 좀 찾아봐야겠다.
간만에 주행거리 100km를넘기니 쪼매 힘들다. :o)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조선 15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까지의 15년이다. 선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이혼(李琿)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정유재란(임진왜란 중 왜군의 2차 침략을 따로 부르는 말)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 조달은 물론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는 등 임진왜란 기간 동안 국가 안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임진왜란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1613년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삼았고, 영창대군은 강화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살해당하였다. 1618년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反正)에 의해 폐위당하였다.
비록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를 회복하고 궁궐 조성공사에 힘을 다하여 창덕궁을 중건하고, 경덕궁(경희궁)·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때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신흥국가로 성장하여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에 대비하여 성지(城池)와 병기(兵器)를 수리하고 군사 양성하는 등 국경방비(國境防備)에 힘썼다. 명(明)나라와 후금(後金)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여 명에서 원군요청이 있자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파견함과 동시에 의도적으로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과 후금사이에서 능란한 중립외교솜씨를 보였다. 일본과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임진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고, 회답겸쇄환사로 오윤겸(吳允謙)을 일본에 파견하여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을 쇄환하였다
서인이 주동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왕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과거 태종과 세조에 비하면 광해군의 이런 과(過) 때문에 폭군으로 몰아간 측면은 지나침이 있으며 당시 서인과 북인 사이에 벌어진 정치적 이념의 갈등, 즉 붕당(朋黨)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 광해군 가족은 강화도로 유폐되었는데 폐세자 이질과 세자빈은 강화 서문 쪽에 안치되었고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동문 쪽에 안치되었다. 폐세자는 강화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자빈은 자결하였다. 이듬해인 1624년 폐비 유씨도 사망하였고 광해군은 이후 제주도로 이배되었다가 1641년에 사망하였다. 묘호는 광해군지묘(光海君之墓)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다.
<출처: 두산백과사전>